종묘-세운4구역 갈등 속 국회서 정책토론회
“평가 범위·기준 불명확…국가유산청 재량 지나쳐”
“기존 인허가 사업 경과규정 없고 중복 평가 우려”
종묘 인근 세운4구역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세계유산영향평가의 적용 범위와 기준을 명확히 하도록 관련 시행령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세계유산지구 밖 개발사업까지 영향평가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해놓고도 구체적인 판단 기준은 없는 데다, 국가유산청장에게 과도한 재량권을 부여해 지방자치단체의 도시계획 권한까지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인허가를 받은 사업에 대한 경과규정도 미흡해 사업의 불확실성을 키운다는 지적이다.
3일 국민의힘 서울시당과 서울시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세계유산 보존과 도시의 미래, 공존의 길을 찾다’ 정책토론회에서는 지난 3월 개정된 세계유산법 시행령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세계유산지구 밖 평가 기준 모호…기존 사업도 영향
발제를 맡은 김지엽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세계유산지구 밖 개발사업에 대한 영향평가 범위가 불명확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세계유산법은 세계유산지구 밖에서도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국가유산청장이 영향평가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법정 세계유산지구와 달리 지구 밖은 공간적 범위를 정해놓지 않아 국가유산청장의 재량에 따라 평가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명확한 기준 없이 국가유산청장의 임의적 판단으로 토지재산권을 제한하면 헌법상 비례의 원칙과 행정법상 신뢰보호의 원칙을 위반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방자치단체의 도시계획 권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김 교수는 “불명확한 기준으로 인해 국가유산청장의 재량으로 지방정부의 도시계획 권한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자체장은 법률에 따라 토지의 용도지역과 건축물의 높이·용적률 등을 정하는 도시계획 권한을 갖고 있는데, 국가유산청장이 세계유산지구 밖 사업에도 별도의 규제를 요구할 수 있어 권한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도시계획을 통한 재산권 제한은 폭넓게 인정되지만 정당성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인허가를 마친 사업에 대한 경과규정이 없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지난 3월 31일 개정된 시행령은 별도의 경과규정 없이 공포한 날부터 시행됐다. 김 교수는 “이미 인허가 절차 등을 완료한 사업을 배제하는 경과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기존 사업의 법적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남진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바뀌면서 문화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들이 함께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규제는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문화유산마다 보호해야 할 가치와 주변 환경이 다른데도 획일적인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유산은 잘 보존했지만 바로 옆 도시는 멈춰 있다”며 노후 건축물이 밀집하고 소방차 등 긴급차량의 진입조차 어려운 주변 지역의 현실을 짚었다. 그는 “보존과 도시계획이 단절될 때 그 부담은 결국 주민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세운지구 개발을 통해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녹지축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서울시는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한 데 이어 종묘에서 세운지구를 거쳐 남산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녹지·보행축을 추진하고 있다. 남 교수는 “녹지축이 완성되면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서울의 상징적인 도시 공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유산청 재량 지나쳐”…형사처벌 규정도 지적
전진원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세계유산영향평가 제도의 법적 불명확성을 지적했다. 전 변호사는 “영향평가를 실시하지 않거나 국가유산청의 조치 명령을 위반하면 형사처벌까지 가능한데 평가 대상과 절차에 관한 규정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불명확하다”고 말했다.
특히 평가 시행 시기를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대통령령에 위임한 구조가 죄형법정주의에 부합하는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변호사는 “도시계획 권한은 기본적으로 지방자치단체에 부여돼 있는데 국가유산청에는 세계유산영향평가와 관련해 상당히 큰 권한이 부여돼 있다”며 “권한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와 균형을 위한 수단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승배 한국부동산개발산업연구원 원장은 규제의 불확실성이 도시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 원장은 “사업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어떤 규제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은 지뢰가 묻힌 밭을 눈 감고 걸어가는 것과 같다”며 “기준과 원칙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세계유산 보존 전문가인 최재헌 이코모스코리아 위원장은 영향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 위원장은 “세계유산영향평가에 관한 시행령까지 갖추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그는 종묘가 조선왕조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신성한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주변 고층 개발이 유산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 위원장은 세계유산 보호에 관한 국제적 약속을 언급하며 “우리 국격을 우리 스스로가 훼손하면 안 된다”고도 말했다.
다만 현행 제도가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최 위원장은 “국가유산청과 서울시,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유산별 장기 관리 기준을 공동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평가 범위와 절차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가유산청도 서울시와 협의해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평가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시는 세운4구역의 사업이 안정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김용배 서울시 도시재창조과장은 “세운4구역은 올해 5월 적법하게 사업시행계획 변경인가를 받은 사업으로 행정의 신뢰성과 예측 가능성이 지켜져야 한다”며 “국가유산청에 공동 현장 실측과 객관적인 경관 검증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은 관련 입법 추진 의사를 밝혔다. 박 의원은 “과거 산업단지 조성에 4~5년 걸리던 인허가 기간을 특별법을 통해 6개월로 단축한 경험이 있다”며 “오늘 토론을 들으면서 문화유산과 도시 개발을 조화시킬 돌파구가 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