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당시 경쟁적으로 계약
준공 시점엔 수요 쪼그라들어
계약 미이행·변경사례도 속출
수도권 신규물량 공실률 53%
시행사·대주단 손실전이 우려코로나19 호황기에 자산운용사들이 경쟁적으로 맺었던 물류센터 선매입 약정 부실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이 체결한 물류센터 선매입 계약 3조8000억원 가운데 1조1000억원 규모가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급 과잉과 전자상거래 성장 둔화로 물류센터 가치가 하락하면서 계약 해지와 소송도 잇따르고 있다.
16일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말~2025년 국내 자산운용사가 선매입 계약을 체결한 물류센터는 23곳, 약정 금액은 총 3조800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7곳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고 2곳은 계약 조건을 변경했다.
미이행 계약 규모만 1조958억원, 계약 변경 사례까지 포함하면 1조2526억원에 달한다. 이 중 2건은 이미 소송으로 번졌다. 실제 최근 H자산운용은 경기 평택시 포승읍 물류센터 선매매 합의 미이행과 관련해 대주단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피고가 됐다고 공시했다. 지난해에는 K자산운용이 경기 시흥시 물류센터를 2600억원에 선매입하기로 한 약정을 철회하면서 계약금과 중도금의 절반을 포기하고 계약을 해지하기도 했다.
선매입 약정은 준공 후 사전에 정한 가격으로 자산을 인수하겠다는 계약이다. 시행사는 준공 후 미분양 위험을 줄이고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 조달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코로나19 당시 전자상거래 시장이 급성장하고 물류센터 몸값이 치솟자 자산운용사들은 경쟁적으로 선매입 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호황기에 착공된 물량이 최근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코리아에 따르면 수도권 물류센터 시장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매년 연면적 200만㎡ 이상의 신규 공급이 이어지며 역사적인 공급 피크를 기록했다. 2023년 공급량은 2018년의 약 3배 수준에 달했다.
반면 전자상거래 성장률은 2022년 이후 한 자릿수로 둔화됐다. 수요 증가를 기대하며 인허가를 받았던 물류센터들이 2~3년 뒤 준공되면서 공급이 수요를 크게 앞지르게 된 것이다.
공실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해 수도권 물류센터 공실률은 22.1%를 기록했다. 특히 저온 물류센터 공실률은 40.7%로 상온 물류센터(14.4%)보다 훨씬 높았다.
신규 공급 물량만 따로 보면 공실률은 53%에 달했다. 저온 물류센터는 78.2%, 상온 물류센터는 43.6%였다.
팬데믹 시기 수요 증가를 기대하며 저온 시설이 대거 공급됐지만 실제 임차인들이 원하는 물류 스펙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상온과 저온이 혼합된 복합 물류센터의 저온 구역 공실이 두드러졌다.
업계에서는 물류센터 선매입 약정 미이행 사례가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시장 가격이 선매입 계약 당시 가격보다 크게 낮아진 곳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운용사가 매입을 거부할 경우 시행사와 대주단으로 손실 위험이 전이되고 법적 분쟁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당시 급등했던 물류센터 가격이 최근 수년 사이 크게 하락했다"며 "호황기에 체결한 선매입 가격과 현재 시장 가격의 차이가 커질수록 계약 분쟁도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떨어진 자산 가치에 주목한 투자자를 중심으로 물류센터 투자 심리가 소폭 회복되는 분위기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당시 물류센터 몸값이 훌쩍 뛰었다가 최근 수년간 자산 가치가 반토막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라며 "건설 원가 정도의 저가에 매입하면 장기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겠다는 판단에 시장 참여자들이 관심을 갖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장기적으로는 물류센터 초과공급이 해소되면서 도심과 인접한 입지의 시설 투자가치가 상승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는 보고서를 통해 "PF 생태계 붕괴, 미착공 사업장 소멸, 경기도 입지 규제 강화가 맞물리면서 수도권 물류센터 신규 공급은 당분간 구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면서 "배송 경쟁이 점차 심화하는 추세라 소비자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거점의 중요성은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으며 특히 퀵커머스의 성장과 즉시배송 서비스 확산은 기존 광역형 물류센터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수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정문 의원은 "물류센터는 국민 소비 생활과 밀접한 인프라인 만큼, 선매입 계약 미이행에 따른 분쟁이 시장 불안과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금융당국이 관련 동향을 지속적으로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