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대 유산영향평가 논란
서오릉서 2㎞ 떨어진 주상복합
50층은커녕 층수 낮추라 압박
문화재 이슈 몸살 태릉골프장
줄다줄다 1만가구→3000가구
서울·수도권 사업지 곳곳 비상
9만가구 넘는 공급 지연 우려
국가유산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근 개발사업에 적용되는 세계유산영향평가 기준을 대폭 강화하면서 서울·수도권 주택 공급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선제적으로 유산영향평가를 받은 경기 고양 창릉신도시와 서울 태릉골프장은 층수와 주택 공급 규모가 줄어들어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 여기에 유산지구 밖까지 거리 제한 없이 적용되는 유산영향평가가 본격 도입되면 주택 공급 지연으로 집값 불안이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고양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따르면 창릉신도시는 2021년 11월 유산영향평가를 시작했지만 4년이 지난 현재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받았으나 계속 보류 상태다.
약 3만5000가구 공급이 계획된 창릉신도시는 인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가운데 서오릉(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이 위치해 있다. 사업지 동쪽 일부 구역 8만4625㎡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돼 있는데, 이는 전체 사업지의 1.1%에 불과하다.
문제가 된 것은 창릉신도시 중심복합지구(CMD)에 계획된 50층 규모 주상복합 건물이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노선이 지나는 창릉역 상부에 들어서는 이 건물은 주거뿐 아니라 상업·업무 기능을 포함해 직주근접형 자족도시를 구현하겠다는 정부 구상을 상징하는 시설이다. 서오릉과 CMD는 직선거리로 2㎞ 이상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앵봉산 산줄기도 놓여 있다.
그럼에도 문화유산위는 “서오릉에서 바라봤을 때 CMD 건물이 능선 위로 보이면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창릉신도시 유산영향평가에 참여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국내 보존지역 기준은 문화재 외곽 경계로부터 반경 500m 이내지만, 유산영향평가는 거리와 관계없이 문화재에서 바라본 경관도 평가 대상”이라며 “서오릉에서 건물이 보이지 않도록 높이를 낮추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실제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공산성 인근의 옛 터미널 용지에서 46층으로 계획됐던 주상복합이 유산영향평가를 거쳐 26층으로 낮아진 사례가 있다. 창릉신도시 역시 층수 조정 가능성이 거론된다.
사업자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주상복합은 토지비와 공사비 부담이 커 고밀 개발이 필수인데, 층수를 대폭 낮추면 사실상 사업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LH 관계자는 “국가유산청과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태릉과 인접한 태릉골프장 개발도 유사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8·4 부동산대책에서 1만가구 공급이 계획됐지만 문화재 논란이 불거지며 이듬해 6800가구로 축소됐다. 이후 2022년 세계유산영향평가를 거치며 주택 공급 규모는 3000가구로 다시 반 토막 났고, 평균 18층이던 층수는 최고 13층으로 낮아졌다. 사업성 악화 우려 속에 사업은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이처럼 기존 기준만으로도 주택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에서 국가유산청이 최근 유산영향평가 대상 사업 기준을 구체화하며 적용 범위를 유산지구 밖까지 사실상 무제한으로 확대하자 서울·수도권 주택 사업지 전반에 비상이 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LH가 2027년 6월 준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구리갈매역세권 개발사업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총 6320가구가 공급되는 이 사업은 태릉과 인접해 있다. 태릉과 강릉의 고도는 각각 56.5m, 59.3m로 일부 사업지 고도(56.7m)와 비슷해 왕릉에서 아파트 상단부가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의릉 주변 정비사업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의릉 반경 500m 이내에는 장위뉴타운 최대 사업지인 장위15구역(3317가구)을 포함해 15곳에서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파주 삼릉 인근의 캠프하우즈 도시개발사업도 일부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사업은 미군 반환 공여지에 공원과 함께 5300여 가구의 주택을 조성하는 계획이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세계유산 반경 500m 이내로만 유산영향평가 범위를 설정해도 서울·수도권 정비사업장과 공공주택지구, 유휴용지 등 45곳에서 9만4119가구가 영향을 받는다. 조선왕릉 대부분과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등 주요 세계유산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파장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 등 관계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국토부는 국가유산청에 ‘유산지구 밖’이라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등 지자체는 유산영향평가 적용 범위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한정하고 평가 여부 결정 권한을 지자체에 위임해달라고 건의했다. 현재 보존지역 범위는 서울 100m, 경기 500m이며 인천은 재산권 침해 등을 고려해 300m로 축소됐다.
세계유산특별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백성준 한성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개발사업의 예측 가능성을 없애는 반시장적인 법안”이라며 “그동안 사회적 합의를 이뤘던 보존지역 100m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일인데, 정책의 연속성과 법적 근거를 갖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국가유산청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겠다는 ‘문화재 만능주의’가 사회적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